<더러운 잠>을 어떻게 보셨나요

더러운 잠
저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이상했어요. 유독 질문과 의견이 많았던 저는 ‘유별나다.’ ‘유난스럽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호기심이 많다.’ ‘창의적이다.’는 칭찬도 받았어요. 사람들이 보는 방식과 제가 보는 방식의 차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결국 ‘시각 예술가(미술가)’가 되었지요.
사실 ‘본다’는 것은 다른 감각들보다 더 지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아는 만큼 본다’는 말도 있고, 또 우리는 생각하는 바에 따라 ‘보고 싶은 대로’ 보기도 하죠.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다른 감각과 달리 대상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물리적인 거리는 심리적인 거리와도 연결이 되고요.
앞으로 ‘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봄’, ‘보는 방식’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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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제가 다섯 살 즈음에 일어났어요. 어느 날 저는 분홍 바탕에 하얀 땡땡이 무늬가 박힌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을 배에서 겹쳐서 끈으로 묶어 입는 옷이었지요. 저보다 세 살 많았던 오빠가 갑자기 자기 친구들 앞에서 그 끈을 잡아당겼고, 제 옷은 활짝 열려 훌러덩 벗겨졌어요. 오빠 친구들은 깔깔 거리며 웃었죠. 그 얼굴들이 아직까지도 또렷해요. 저는 매일 보며 살아야 하는 오빠를 미워하기보다 옷을 탓하기로 했죠.

“왜 내 옷은 이렇게 생겨서 놀림을 받게 된 거지?”

물론 엄마가 누군가 쉽게 벗기라고 저에게 그런 옷을 입히지는 않았겠지만, 어린 눈으로도 여자 옷과 남자 옷이 다른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자 옷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움직이기 불편한 것이 많잖아요. 입고 벗기 쉬운 원피스 종류는 여성만 입고요. 여자 옷은 벗기 쉬우라고 이렇게 만든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더랬죠.

지난 겨울, 이구영 씨의 <더러운 잠>이 논란을 일으켰을 때, 그 어린 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어요.

<더러운 잠>은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구도와 배경을 빌려온 후, 침대에 누운 여성의 신체는 조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로, 그 얼굴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씨로 바꾸고, 흑인 하녀의 얼굴은 최순실 씨로 바꾸어 넣은 미술 작품이예요. 이 작품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미술가들이 표창원 국회의원의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로비에서 열었던 시국 풍자 전시회 ‘곧, 바이!’ 전에서 전시되었다가 하루 만에 보수 단체에 의해 훼손되었지요.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 (Olympia)>

미술가의 입장에서 작품의 출처를 조금 살펴 보면, <올랭피아>는 마네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누드화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모델이 그림 밖 관객(=남성)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관음증적인 시선에 도전하도록 의도한 작품이예요. 그 전의 누드화들이 여성의 곡선을 강조하며 신체를 부드럽고 따뜻하고 풍만하게 묘사해서 촉각을 자극했던 반면, 마네는 창백하고 평범한 육체를 표현했고요. 한 마디로 전통적인 누드를 패러디한 작품이었던 것이지요. 반면 조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는 전통적인 누드의 화법을 따른 전형적 작품이고요.

조르지오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Sleeping Venus )>

그런데 이구영 씨는 굳이 <올랭피아>의 구도를 빌리면서 여성의 신체 묘사는 전통 누드의 어법으로 되돌려 놓았어요. 애당초 이승만부터 이명박까지 남성 대통령이 벗겨진 예를 본 적이 없는데 박근혜 씨만 풍자화 속에서 벗겨진 것은 왜일까요. 그 많은 지탄을 받았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쥐’에 비유될망정 아무도 옷을 벗기지는 않았는데 말예요.

자연히 이 작품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치열했는데요, 각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어요.

<더러운 잠> 찬성

<더러운 잠>이 권력자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예술’이니 ‘예술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박근혜 씨는 최고 권력자이고 <더러운 잠>을 제작한 이구영 씨는 일반 국민이기 때문에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 사람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은 정당하고, 특히 ‘예술의 표현’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더러운 잠> 반대 (또는 우려)

  • 박근혜 씨 또는 권력자를 조롱하고 풍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 이들은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과 국민을 다스리는 ‘왕’을 혼동하는 듯한 언행을 보이고, <더러운 잠>을 보자마자 분노하며 작품을 훼손하는 행동으로 응징을 했죠. 전시 주최자인 표창원 의원을 공격하기도 했고요.
  • ‘여성 혐오’를 내세운 사람들 : 박근혜 씨가 직무를 수행했는지 부정부패가 있었는지 밝히자 하면 ‘여성 혐오’라고 반격하는 사람들이에요. 요즘 ‘페미니즘’이 유행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애꿎게도 표창원 의원의 부인을 누드 이미지와 합성하여 공격하는 기행(!)을 저질러서 스스로 ‘여성 혐오’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냈지만요.
  • 박근혜 씨로 인해 ‘여성’ 정치인에게 선입견이 생기고, ‘여성 혐오’가 정당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 : 박근혜 씨의 직무유기나 부정부패보다도 ‘여성’이라는 점에 집중해서 해석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죠.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희화화하는 분위기를 우려하는 입장이고요.

평범한 닭 © Sophie Higginbottom

하나의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더러운 잠>에 대한 논쟁은 안타깝게도 어떤 식으로든 문제제기를 하면 ‘반대편’이 되어 공격을 당하는 구도였지요.

저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더러운 잠>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거든요. 굳이 옷을 벗기지 않더라도 권력의 횡포를 비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여성’을 공격하는 자극적인 방법을 쉽게 선택한 것 같았으니까요.

<더러운 잠>을 제작한 이구영 씨는 공중파 3사보다도 시청율이 높은 ‘파파이스’(김어준 씨가 진행하는 한겨레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성 혐오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작품 자체에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일축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씁쓸했어요. 박근혜 씨가 유체이탈 화법을 쓰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고요.

봄 매거진(3)

반세기 전에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했죠.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저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독자들이 의미를 만들어나간다고요. 그보다 옛날인 중세나 르네상스의 고전 그림들은 대부분 성경 이야기나 신화 등 권력자가 기록하고 싶은 내용이나 보여주고 싶은 것을 내놓는 수단으로 존재했지요. 그 후 근대 사회가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자리잡으면서 예술은 권력자의 수단이 아닌 개인의 의지와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가 되었고요. 이제는 작가의 ‘의도’조차 의도에 그칠 뿐 그 작품의 ‘효과’는 다를 수 있어요. 현대 관객들은 소수의 엘리트가 제시하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눈으로 작품을 보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소양이 있거든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작가 자신이나 힘있는 일부 관객의 해석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지 않아요. 모든 관객은 각자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자유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더욱 <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쟁은 다른 의견을 잘 들어보지도 않고 서로 무시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소모적이었던 것 같아요. 작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예술을 몰라서 그런다’고 반박하고, 작품을 옹호하면 ‘여성 혐오자’라고 낙인찍는 방식으로 평행선만 그어지면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대화할 기회가 없어졌던 것이지요. 하나의 작품을 두고 ‘예술의 자유’로부터 ‘예술 속 성차별’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기회로 풀어나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예요.

<더러운 잠> 논란은 거국적 사태 속에서 하나의 조각에 불과했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어요.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내편 네편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회로 변해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치닫는 세력들이 고개를 돌려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 만으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한계를 극복하고 가능성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이 충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미술사를 되짚어보고 사회현상들을 관찰하며 작업하고 글 쓰는 미술가이자 네 멍뭉이의 엄마입니다. 여성주의저널 일다에서 객원기자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에서 담임교수로, 세월호 약속지킴이로 활동 중이기도 합니다. ✿ Reviewing art history from feminism perspective and observing social affairs, Choongyeol Lee creates words and artworks. She is also a contributor in Ilda, and proud mother of four pupp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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