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탈북자, 난민, 생존자, 그리고 자유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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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HRNK

“삼촌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고, 잠시 후 그 분은 돌아가셨어요.”

박지현 씨는 처음으로 가족의 일원이 굶어 죽은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삼촌은 뼈가 날카롭게 튀어나오고 팔과 다리가 막대기처럼 앙상했다. 삼촌은 그렇게 사망에 이른 첫 번째 희생자는 아니었다. “극심한 기근은 모두를 조금씩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도시 곳곳에는 우리 가족처럼 단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밝은 여름 아침에 눈을 뜨는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스마트한 옷매무새를 갖춘 박지현 씨는 걸을 때 살짝 다리를 끈다. 북한의 극악한 독재체제에서 도망 나오며 그녀가 겪은 시련의 증표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농업·사회 경제는 소련연방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고, 이를 통해 매월 식량을 배급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북한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고 정부의 불충분한 식량 배급과 악천후는 고난의 행군(1994~1998)으로 알려진 극심한 기근을 불러와 수천 명에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고난의 행군은 역사상 최악의 기근 중 하나였다. “기아로 인해 동네 아이들의 배가 불룩해졌어요. 우리는 들과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손가락으로 나무뿌리를 파내서 끓여 먹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박 씨의 말이다.

박지현씨는 “서구 국가들이 우리나라에 경제재재를 가한 탓”이라고 들었다. 여느 북한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태어날 때부터 국가에 복종하도록 세뇌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서 수학과 과학을 전공한 박 씨는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꿈은 곧 좌절되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출혈로 쓰러졌다. 오빠는 금을 불법으로 유통한 죄로 군부 관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박 씨는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에게 탈북하라고 조용히 설득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인생을 바꾼 이 결심을 내린 순간을 회상하면서 그녀는 아직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듯했다.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떠났습니다. 차가운 방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뒤로하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났어요. 다시는 아버지를 뵐 수 없었고 어디에 묻히셨는지도 모릅니다.”

박 씨와 남동생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고 곧 헤어지게 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박 씨는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되었다. “중개인이 동생을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중국인에게 저를 5,000위안 (약 500파운드)에 팔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저는 동생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탈북자의 80%는 여성이다.

2009년 6월 미 국무부는 인신매매에 관한 보고서에서 “가장 흔한 사례는 여성이 중국인들에게 신부로 팔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밖의 사례들을 보면 “북한 여성과 소녀들이 식량, 일자리, 그리고 자유에 대한 약속을 받고 모국의 어려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도망 나오지만”, 중국에 도착하면 매춘, 강제 결혼 또는 노동 착취를 강요받게 된다는 것이다. 몇몇 경우에는 탈북 여성들이 같은 인신매매범에 의해 여러 번에 걸쳐 다른 남성들에게 팔리기도 한다. 탈북자들은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강제 노동과 성 착취를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 남자들은 북한 여성들을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했습니다. 손상되거나 쓸모없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재판매’해도 된다고 생각했죠. ‘주인’들은 우리가 함께 있으면 서로 도망치자고 부추길까봐 밖에서 모이는 것을 싫어했어요. 한 여성은 남자 두 명에게 팔린 후, 방에 가두어진 채 한 발짝도 밖에 나올 수 없었어요.” 박 씨의 말이다.

박 씨는 6년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기본적인 생필품도 없이 지역 사회로부터의 격리된 채 수년간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 남편과의 강제된 성관계를 견뎌냈다. 그녀는 곧 임신하게 되었지만, 낙태를 강요당할까 봐 이를 숨긴 채 육체적인 노동을 지속했다.

아들 용은 1999년에 태어났다. 아들이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애원해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채 겨우 아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5살이 되었을 때 중국 당국에 박 씨에 대한 신고가 들어가 강제로 아들에게서 격리되었다. 엄마에게서 떼어내자 아들은 발을 차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박 씨는 추방당하고 아들만 중국에 남게 되었다.

“중국은 우리를 정치적 난민이 아닌 불법 이주노동자로 봤습니다. 중국 땅에서 잡힌 모든 탈북자는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정치범 수용소에서 긴 형을 받게 됩니다. 중국의 인권 유린은 비밀이 아니지만, 특히 북한 여성들에 대해 심합니다. 제가 직접 착취와 인권침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박 씨는 두만의 구금소로 보내졌고, 일주일 후 범죄자로서 북한으로 추방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온성 노동수용소, 그리고 또다시 지역교화소를 거치면서, 박 씨는 김정일 정권하에서 탈북을 하다가 걸리면 겪게 되는 일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과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경비원에게 여러 번 요청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참을 수 없어서 화장실로 달려갔죠. 그에 대한 벌로 물도 없이 맨손으로 화장실을 청소해야 했습니다.”

온성 노동수용소에서 박 씨와 다른 수감자들은 짐승처럼 달구지를 끌고 맨손으로 땅을 파고 무거운 짐을 든 채 맨발로 달리며 일했다. 오전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돼지 사료뿐이었다. 그래서 생감자를 캐 먹고 동물 배설물에서 씨를 골라냈다. 박 씨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냈는데, 이들에게 화장실 대신 양동이 2개가 주어졌다. 생존, 그리고 아들 용에 대한 생각만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박 씨는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 것을 발견했다. 간수들에게 끊임없이 맞고 매일 하수도에서 일하다가 괴저가 생긴 것이다.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저가 옮을 우려 때문에 간수들은 가족의 서명을 받는 조건으로 박 씨의 석방을 허가했다. “삼촌이 서명을 해주어 수용소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삼촌은 저를 두고 가면서 저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감염된 다리가 썩으면서 다른 부위들로 퍼지는 와중에도 박 씨는 노숙자로 생존하기 바빴다. 다리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어느 친절한 한의사 덕분이었다. 한의사는 썩은 뼈에 약초를 처방하고 괴저 치료를 위한 하얀 가루를 주었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박 씨는 아들 생각뿐이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아직 살아는 있는지, 중국인 남편이 팔아버리진 않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찾아야만 했어요. 다시 북한을 탈출하고 아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 자신을 다시 파는 것뿐이었죠.”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박 씨는 인신매매범의 도움을 받아 산을 넘어 다시 한번 탈북을 감행했다. 아들과의 재회는 황홀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가슴을 무너뜨렸다. 야윈 뺨과 더럽고 벗겨진 피부 때문에 아들을 거의 못 알아볼 뻔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들을 되찾았지만, 한국대사관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둘은 몽골로 향하는 위험한 여정을 선택했다. “국경 울타리는 2m에 달했습니다.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모두 일단 달렸어요. 다리 때문에 뛸 수 없는 저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걸을 수밖에 없었어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릴 때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앞서 달려가던 남자가 되돌아와 아들을 안아 들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 몽골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었을 때,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땐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렇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 역시 탈북자이다. 그들은 함께 몽골의 사막에서 3일 동안 지내다가 혹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한국 음식을 팔면서 생계를 벌었다. 그러던 와중, 박 씨는 어느 한국인 목사를 알게 되었고 그 목사가 그녀를 북경 주재의 유엔 사무관에게 소개했다. 그 이후의 일은 언론에 알려진 대로이다.

박 씨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시 베리 구에 살고 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진심 어린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난민 지위가 인정받아 비자를 받았을 때 울고 또 울었어요.” 드디어 그녀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13년, 영국은 30건의 탈북 난민 신청을 거절했다. 박 씨는 이때 처음으로 탈북 난민 신청이 거부되는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엔 북한 조사위원회 앞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와 폭력에 관한 증언을 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2015년 6월 유럽북한인권협회(the European Alliance for Human Rights in North Korea, EAHRNK)는 “해명이 필요한 사례: 유럽의 망명 정책과 탈북자들(A Case for Clarification: European Asylum Policy and North Korean Refugee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들의 대다수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3년에는 네덜란드에서 128건의 탈북 난민 신청이 모두 거부되었고, 벨기에에서는 126건, 프랑스에서는 19건이 거절당했으며, 스웨덴에서도 5건이 인정되지 않았다.

박 씨는 현재 유럽북한인권협회의 영국 내 공익사업 및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북한의 인도주의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와 변호 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그녀가 운영하는 “피닉스(불사조)” 인턴십 프로젝트는 탈북 청년들이 새로 정착한 국가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멘토링과 훈련 프로그램으로, 향후 북한의 정부, 인프라, 경제 재건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70년간 삼대에 걸친 독재체제가 주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짓밟고 있는 북한은 최악의 국가입니다. 북한의 현 독재 정권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북한 사람들은 바깥 세계와 완전히 고립되어 자신들이나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전기도 없이 어두운 터널 속에 살면서 추운 겨울에도 하루 한 끼라도 벌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합니다. 하지만, 북한 역시 변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터널 끝에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70년간 유지되어 온 독재 정권은 조만간 자유를 꿈꾸는 북한 사람들에 의해 무너질 것입니다.” 박 씨의 말이다.

남편 광 씨는 언제나 곁에서 그녀에게 힘을 준다.

“당신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겪게 되는 시련을 직접 경험했어요. 그리고 북한의 구금소와 교화소에서 지낸 경험도 있고요. 이 여성들이 지금 받는 고통에 대해 세상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이에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손가락질하거나 당신을 비웃는다면, 내가 당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 줄게요. 북한 여성의 인권에 관해 세계 다른 국가들에 알리는 것이 중요해요.” 남편의 말이다.

박 씨는 말한다. “제 프로젝트를 항상 지지해주는 제 큰아들과 항상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말해주는 둘째와 셋째에게 감사합니다. 이 아이들의 도움 없이는 오늘이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북한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울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거예요.”

(번역: 트렌스데믹스 권신애 번역가)

박지현 씨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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