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에서 절이 된 길상사, 그 자리에서 김영한을 생각하다

길상사 내

“이 동네엔 독특하고 유명한 절이 있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으로 이사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인이 말했습니다. 그 절이란 길상사, 한때 고급요정이었던 곳이라고 하네요. 절이 된 요정 또는 요정이었던 절. 호기심이 동합니다. 위치를 검색해 보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동네 분위기도 익힐 겸 걸어가 보기로 합니다.

큰 길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드니 그 흔한 상점 하나 없이 높고 긴 담벼락들 너머로 대저택들이 보일락 말락 숨어있습니다. 고요하고 한적한 오르막길에 이따금씩 매끈하고 묵직한 자동차가 지나갑니다. 걷는 사람은 우리뿐, 여름날에도 서늘한 골목길이 텅 비어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세계인가 의문이 들 때쯤 길상사의 거대한 입구를 만났습니다.

‘와아! 처마부터 남다르구나!’ 

화려하고 정교한 처마의 형태와 빛깔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확실히 예사로운 곳은 아니지요. 이 곳은 70, 80년대에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날리던 대원각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자들이 소위 ‘요정 정치’를 펼치던 곳이었지요.

길상사 입구

빨리 가까이서 보고 싶어 달려가는데 표지판이 제 앞을 가로막습니다. 짧은 치마, 반바지를 입고 오신 분은 종무소 앞에 준비되어 있는 랩스커트를 착용하고 들어가세요. 친절하고 정중한 명령에 가고픈 곳 어디로든 데려다주던 제 튼튼한 두 다리는 드러내기 민망한 무엇이 되어버렸고, 편하고 시원했던 원피스는 금세 고쳐야 할 옷차림이 되었습니다. 여성의 신체에 기댄다는 속평을 듣던 요정이 여성의 신체를 금기시하는 절이 된 아이러니와 함께 말입니다.

유명 사찰에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한 눈에도 다른 절의 구조와 다르게 복잡합니다. 유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서면 하늘거리는 한복을 입고 앉은 가야금 연주자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전쟁을 몇 차례 겪었을 법한 울창한 나무들과 작고 깊숙한 오두막들 사이사이에선 연인들의 소곤거림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 한 켠에 공덕비가 있습니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

안내판으로 성이 차지 않아 검색을 해 봅니다. 길상화는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의 법명이라는군요. 그가 시주한 것은 대원각 자체였고요. 당시 시가로도 1천억 원대의 재산, 그것도 수십년간 평지풍파를 함께 해 온 삶의 터전을 선뜻 내어 주다니 보통 사람이 할 일은 아닐 듯 합니다. 김영한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길상사 안의 계곡

1916년에 태어난 김영한은 가난 때문에 15세 어린 나이에 팔려가듯 결혼을 했습니다. 신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에 빠져 죽었고,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던 김영한은 결국 집을 나와 16세에 기생이 되었지요. 기생으로서 가무와 궁중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잡지 <신천리>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고 총명했다고 합니다.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에서 활동하던 스승 신윤국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갔지만, 스승의 투옥 소식을 들은 김영한은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모던 보이’ 백석 시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요. 백석은 기생과 동거한다는 사실에 집안의 미움을 받아 강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김영한에게 도망가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후 혼자 북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 분단의 현실로 인해 돌아올 수 없게 된 백석을 그리워하던 김영한은 하루 18시간씩 공부에 몰두하며 당시 드문 대학생이 되기도 했어요. 이후 한식당 대원각을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요정정치의 중심지로 커나갔던 것이죠.

김영한은 1987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깨달음을 얻어서 대원각을 시주하려 하였으나 법정스님이 거절했고, 이후 10년간 줄다리기 끝에 1996년에 시주가 받아들여져 1997년에야 지금의 길상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엄혹한 일제 시대에 일본 유학과 모던 로맨스를 경험하고, 서슬 퍼런 독재 시대에 대형 요정의 주인으로서 권력의 중심을 보고, 끝으로 법정스님과 무소유를 두고 줄다리기를 했다니. 정말 굉장한 인생 아닌가요.

시주 길상화 공덕비

“저 여자, 백석 시인의 애인이었대!”

한 중년 여성이 곁에서 같은 비문을 읽고 동행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군요. 비석 옆 안내판에는 ‘공덕주 길상화(본명 김영한) 보살’의 84년 인생이 열 다섯 줄로 쓰여 있습니다. 그에 이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스무 줄이 적혀 있고요.

백석을 검색하면 김영한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알려 주는 에피소드 정도로 언급되기 마련이지만, 김영한을 검색하면 백석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백석이야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리는 문학가이지요. 1930년대에 일본 유학생 출신 영문 번역가로서 엘리트 중 엘리트였고, 잘생긴 얼굴도 유명합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도 맡았다네요. <여성>은 ‘주로〈결혼론〉·〈주부와 수양〉 등 여성에게 관계된 지식과 문학작품을 많이 실었’다는데, 발행인과 편집인은 모두 남성이었던 모양입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여성독자를 상대로 여성의 관심사와 삶을 규정하고 전파하여 계몽하는 것, 예나 지금이나 정말 별로인데 말이죠.

다시 안내판에 적힌 시의 내용을 봅니다. 김영한이 쓴 <내 사랑 백석>을 보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는 김영한이어야 하는데, 왜 백석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일까요? 찜찜한 마음이 들어 더 검색해 보니, 실제로 많은 문학가들이 백석의 ‘나타샤’는 김영한이 아닌 다른 여성이라고 주장한다네요. 백석은 김영한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던 3년 동안 결혼을 세 번 했고, 사랑하는 통영의 처녀 ‘란’도 만났다고 합니다. 김영한의 삶은 백석과 연애한 3년을 중심으로 그 사랑을 못 잊고 사는 여인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말입니다.

길상사 내 공덕비 안내문

김영한의 인생에 백석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가무에 재능 있는 여성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고,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며,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하나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언론은 그가 ‘기생’이었다는 것과 백석과 연애하고 잊지 못해 ‘백석 문학상’을 만들었다는 것, 법정스님의 훌륭한 작품 <무소유>에 감화받아 전재산을 시주했다는 등의 이야기만 전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일본에서 유학하던 김영한이 스승의 투옥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신여성 문학가 또는 궁중 예술 전수자로 인명사전에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백석의 부모가 김영한이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반대를 하지 않았다면 김영한은 백석과 함께 문학가로 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1950년대 당시 총 4만명도 안되던 대학생 중 하나였던 김영한이 세간의 이목을 무시하고 계속 공부에 전념했다면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과연 그럴까요. 자신을 키워준 스승의 소식을 외면하고 동경 유학을 마쳤다면 ‘독한 여자’라고 낙인이 찍혔을테죠. 백석과 결혼했다고 해도 백석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계속 공부를 하였다 해도 남성중심 학문 세계에서 김영한의 재능을 시기하는 남성들에 의해 ‘기생’이었다는 점만 부각되어 여러 소문만 낳고 학문적 성취를 온전히 인정받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김영한 자신이 쓴 <내 사랑 백석>을 보아도 김영한은 실제로 평생에 걸쳐 옛정 백석을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능 있고 똑똑하고 경제력까지 있었던 김영한이 왜 백석을 놓지 못했던 것일까요?

길상사 내 김영한 초상

혹시 일부러 놓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16세에 다시 독신이 되어 1999년에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긴 세월 동안 이 사회에서 남편 없이 살아가려면 마음 속의 남편이라도 필요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혼자 사는 여성에게 끊임없는 구애가 쏟아지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영원히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선언하고 철벽 방어를 하는 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에 넘치는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억지로 결혼을 해서 가부장제에 안전하게 안착한 여인네로 살기보다는 잘생기고 똑똑한 바람둥이 백석과의 로맨스를 훈장처럼 기억하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살아가는 편이 더 자연스럽고 현명했을 테지요.

그래요. 사실 김영한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준 스승의 지지도 받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문명도 경험하고, 뜨겁고 낭만적인 연애도 해보고, 당시에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원 없이 공부도 하고, 자신의 능력을 마구 펼쳐 사업에도 성공하고, 말년에는 속세의 것을 말끔히 놓고 멋진 사찰도 만든, 엄청나게 다이나믹한 삶을 살았던 멋진 여성입니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네요.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 내

여름날에도 산뜻한 길상사는 확실히 맑고 장엄한 절입니다. 김영한은 마지막 소원까지 이룬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김영한에 대한 평면적 해석에 애가 타는 것은 저같은 평범한 이들일 뿐, 정작 김영한 선생님은 후대를 귀엽게 보며 느긋하게 웃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상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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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열

이 충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미술사를 되짚어보고 사회현상들을 관찰하며 작업하고 글 쓰는 미술가이자 네 멍뭉이의 엄마입니다. 여성주의저널 일다에서 객원기자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에서 담임교수로, 세월호 약속지킴이로 활동 중이기도 합니다. ✿ Reviewing art history from feminism perspective and observing social affairs, Choongyeol Lee creates words and artworks. She is also a contributor in Ilda, and proud mother of four pupp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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